창작극 ‘무명의 용병사’, 이름 없는 자들의 기록을 다시 쓰다

권수빈 기자 / 기사승인 : 2025-11-17 09: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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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녕팩토리

[뉴스타임스 = 권수빈 기자]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병사들의 목소리를 소환하는 작품이 연극계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박민재 작가의 창작극 ‘무명의 용병사’는 제2회 청주창작희곡상 최우수상 수상을 계기로 주목받기 시작해 청주, 대구 등 지역 무대를 거치며 확장돼 왔다. 더 나아가 강원문화재단 전문예술단체 지원작에 선정되면서 지역 기반의 창작극이 대학로 무대에 진입하는 드문 사례로 기록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작품은 침몰하는 왜선 위에서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한 두 병사가 우연히 마주하며 시작된다. 과거 항왜였으나 조선에 투항한 병사와 일본군 병사가 죽음의 문턱에서 서로의 과거와 상처를 마주하는 과정은 전쟁을 개인의 감정과 목소리로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들은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 속에서 대상화되던 존재들이지만 극은 그 경계를 지우고 인간적 공감이 발생하는 순간에 집중하며 전쟁의 본질을 정면으로 묻는다. 극의 서사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되 ‘기억에서 지워진 이름 없는 자’를 무대 한가운데로 불러낸다는 점에서 방향성을 갖는다.

특히 작품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타악 연주와 소리, 몸짓을 결합한 연희·퍼포먼스적 장치를 담당하는 인물 ‘결화’이다. 연희극 전문가가 맡은 이 역할은 두 병사의 심리적 변화, 전쟁터의 긴박함, 언어로는 담기 어려운 감정의 진폭을 시각화·청각화하며 연극의 질감을 깊게 만든다. 이는 2025년 대구 공연에서도 강조된 바 있으며, 청년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신체 연기와 무용적 요소가 강화되면서 작품의 무대 언어가 보다 입체적으로 확장됐다.

‘무명의 용병사’는 원작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 창작극으로, 박민재 작가의 문제의식이 직접적으로 녹아 있다. 그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전쟁의 그늘 속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병사들의 존엄을 다시 바라보고 싶었다”는 창작 의도를 드러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적 질문으로 발전한다. 우리는 누가 기억되고 누가 잊히는가. 전쟁 이후 남겨진 자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복원될 수 있는가. 전장이라는 극한의 공간에서도 인간 사이의 연대는 가능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오늘의 세계를 향한 성찰로 이어진다.
 

사진=안녕팩토리

또 하나의 의미있는 지점은 지역 기반 창작 생태계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청주에서 발원한 창작극이 대구의 청년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 냈고, 다시 강원도와 수도권 대학로로 이동하는 흐름은 지역 문화예술이 보다 주체적인 창작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지역 예술계가 개발한 신작이 ‘독립적 예술 가치’로 평가받으며 중심 공연 시장과 교류하는 사례는 여전히 드물기에 ‘무명의 용병사’의 행보는 그 자체로 한국 공연예술의 흐름 속에서 의미 있는 지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아직 대중적 후기와 온라인 리뷰가 충분히 축적된 단계는 아니지만 관극한 이들이 전하는 평가는 대체로 “극적 밀도와 여운이 깊다”, “신체 연기와 사운드가 만든 몰입감이 뛰어나다”는 반응으로 수렴된다. 소극장이라는 공간적 제약 속에서도 역사극 특유의 거창함 대신 밀도 높은 정서와 심리적 긴장으로 승부하는 작품은 오히려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며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무명의 용병사’는 거대한 폭력의 서사 뒤편에서 눈에 띄지 않았던 인간의 얼굴을 복원하는 연극이다. 이 작품이 2025년 여러 도시를 거쳐 확장해 온 발걸음은 우리가 잊고 지나친 이름 없는 자들의 역사에 다시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무명의 용병사’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강한 힘을 가진다.

뉴스타임스 / 권수빈 기자 ppbn0101@newstimes.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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